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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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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초(家狀 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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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가장 초(家狀 抄) 유물형태 고문서
기탁자 크기 30.5×28.0㎝

한 집안 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가장(家狀)이라고 한다.
이 가장은 이지억(李之億 ; 1699∼1770)이 기록한 것이다. 이지억은 모두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보연과 응덕은 일찍 죽었으며, 세 딸은 각기 파평윤씨(윤항진), 청주정씨(정장간), 풍산류씨(류사춘)에게 출가하였다.
이지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진(德震)·항수(恒水), 호는 성헌(醒軒), 이조판서를 지낸 광정(光庭)의 후손으로, 만선(萬善)의 아들이며, 정랑 만성(萬成)에게 입양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여당이라는 무고를 당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175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장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4년 강릉부사·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간 지 10년이 못되어 정경의 자리에 올랐는데, 관직은 모두 왕의 특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승진이 관직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처사라 하여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후 공조·형조·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동안 파직과 등용이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