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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고도서

간재집(簡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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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간재집(簡齋集) 유물형태 고도서
기탁자 크기 31.0×20.0

변중일(邊中一, 1575~1660)의 시문을 총1책으로 엮어서 성상 11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한응(李漢膺)의 서문이 있다. 시(詩) 41수, 서(書) 5편, 기(記) 1편, 제문(祭文) 1편이 있고, 부록으로 변중일에 대한 행장, 묘갈명, 묘지명, 행록 등이 실려 있다. 시에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증시(贈詩)가 많이 보인다.
변중일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가순(可純), 간재(簡齋)는 그의 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하자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 하였다. 이때 가산을 팔아 구입한 쌀 100섬을 상주진(尙州鎭)으로 보내니 상주의 진장(鎭將) 김각(金覺)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김성일을 찾아 진주로 갔으나 김성일이 이미 전사한 뒤였으므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火旺城)으로 달려가 박수춘(朴壽春)·성안의(成安義)·남사명(南士明)·유복기(柳復起)·정사성(鄭士誠) 등과 협력하여 대적(對敵)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선조가 국초에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노비 30가구가 김해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추노(推奴)하려다가 그들의 무고를 입어 경옥(京獄)에 감금되었다. 인조반정으로 1623년 석방되었으며 노비 100가구를 하사받았다.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며, 뒤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다. 1686년(숙종 12) 경상도안찰사가 그의 충효에 대한 행적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정려를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