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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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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첩(敬守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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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경수첩(敬守帖) 유물형태 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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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안동권씨 병곡종택이 소장하던 『경수첩(敬守帖)』이다. 권주(權柱)가 벼슬살이하면서 썼던 글 중 대표적으로 남길만한 글을 1책으로 필사한 책이다. 보물 제10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권주(權柱, 1457~1505)는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이다. 1474년 진사시에 합격, 1480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94년 12월 홍문관직제학 표연말(表沿沫), 전한(典翰) 양희지(楊熙止)와 함께 「대행왕행장(大行王行狀: 성종행장」을 찬진하고, 1495년 3월 다시 「대행왕시책(大行王諡冊)」을 제진(製進), 같은 해 8월에 집의, 1498년 7월 통훈대부에 오르면서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을 역임하였다.
1504년 윤4월 정축일에 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며, 그달 경진일에 사사시켜야 한다는 전지가 있었으나, 유순(柳洵)·김수동(金壽童) 등의 “권주는 그 당시에 주서로 단지 승지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다.”는 계(啓)에 따라 사형을 면하고 장형(杖刑)을 받은 뒤 평해(平海)로 귀양갔다. 그러나 1505년 6월 폐비 윤씨의 사사 때에 사약을 받들고 간 것으로 거듭 논죄되면서 사사되었고, 형제자매도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중종 1) 10월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신원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환장(還葬)이 허용되었다. 젊은 나이로 등제하였으나 문학에 뛰어나 명성이 있었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대명외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