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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현판

오계서원(迃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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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오계서원(迃溪書院) 유물형태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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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평은면에 위치한 오계서원의 현판이다.
오계서원은 1570년(선조 3) 여름에 이덕홍(李德弘)이 30세 때 태조봉 남쪽 기슭(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천 마을)에 학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기르기 위하여 오계정사(迃溪精舍)를 건립하여 동재를 관성재(觀省齋), 서재를 험위료(驗爲寮)라 하였다. 그 뒤 1592년 임진왜란 중에 병화로 정사가 퇴폐된 것을 1600년(선조 33)에 선생의 큰아들인 선오당 이시(李蒔)가 오천 마을로 오계정사를 옮겨 세웠고, 1636년(인조 14) 대홍수로 서당의 건물 몇 칸만 남기고 표실되었다. 이 때 현판이라도 찾으려고 향내의 유림들이 냇물을 따라 예천군 보문 까지 백여 리를 냇가는 물론 강바닥까지 파헤쳐도 찾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신천변(新川邊 : 현 영주시 이산면 신천리)에서 쉬고 있을 때 건너편 바위 밑에서 석양을 받아 서기(瑞氣)가 어리므로 이상히 여기고 건너가서 물 속을 살피니 관성재 현판이 있는지라 예사롭지 않는 일이라 여기면서 찾을 수 있었다.
1663년(현종 4) 여름에 향내의 선비들이 간재 이덕홍의 사당 건립을 논의하여 1665년(현종 6)에 도존사(道存祠)에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영천 사림에서 오계서당을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강당을 명륜당, 정문을 입도문(入道門)이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현 위치에 다시 건립하여 복설하였고, 1724년(경종 4)에 영천 사림의 공론으로 간재선생의 큰 아들 선오당 이시를 배향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 8월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것을 일제시대 및 1970년대에 중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