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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지폐<호조태환권>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호조태환권>

유학에 있어서 산업관은 농본억상(農本抑商)으로 되어 왔다. 그렇지만 16세기 후반부터는 현실적으로 교환의 필요성에 의해 장시(場市)가 늘어나면서 조선후기에는 1000여 개의 장시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농업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상업으로 이를 보완한다는 의미로 무본보말(務本補末)로 표현하기도 한다.

유학 경제사상은 인정(仁政)의 전제로서 기초적인 소비 욕구의 충족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수기(修己)의 핵심 과제로서 인의(仁義)를 손상할 우려가 큰 사리(私利) 추구나 경제적 동기의 억제를 추구하였다. 유학의 경제사상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함께 재분배(再分配)의 유지와 발전을 기본 과제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를 손상할 우려가 큰 사리 추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곤란했다. 조선후기 시장이 성장하면서 국가적 재분배를 중심적 배분체계로 설정하면서도, 시장기능을 활성화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적 재분배를 보완, 개선하고자 했던 실학의 경제사상이 대두하였다. 실학자들은 경제적 동기를 제한적 내지 전면적으로 긍정하였고,그 때문에 상업에 대한 긍정적인 관념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물질적 유인을 중시하는 경세론이 위상을 높이면서 수기론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갔다.

시장의 성장이 실학적 경제사상을 형성시킨 주요한 계기였다면, 서양 근대문명의 충격은 개화사상을 성립시킨 주요한 계기였다. 개화파는 경제적 동기를 중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경쟁을 사회원리로서 인식하고 재산권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유교의 전통에 바탕을 둔 근대화를 추구하였는데, 개화에서 유교윤리는 제한되고 일면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위상이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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