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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고도서

목은문집(牧隱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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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목은문집(牧隱文集) 유물형태 고도서
기탁자 크기 32.5X22.0

이 책은 진성이씨 상계파 남애고택에서 소장하던 목은문집(牧隱文集)이다. 이색(李穡, 1328~1396)의 문장을 총2책으로 엮어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권근(權近)과 이첨(李詹)의 서문이 붙어 있다. 권1~6에는 기(記) 75편, 권7~9에 서(序) 39편, 권10에 설(說) 21편, 권11~13에 표전(表牋) 22편, 찬(讚) 10편과 잠(箴)ㆍ전(箋)ㆍ변(辨)ㆍ명(銘)ㆍ서후(書後)ㆍ발문(跋文) 등 33편, 권14~20에 비(碑)ㆍ명(銘)ㆍ전(傳) 등 35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穎叔), 목은(牧隱)은 그의 호이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元)나라 국자감생원이 되었다.
그 뒤 귀국하여 1353년(공민왕 2) 향시(鄕試)에 1등으로 급제하여 서장관으로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1354년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급제하였다. 원의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나, 1356년 귀국하여 조정에서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시켰다. 이후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 최고의 영예를 누리면서 신유학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1375년(우왕 1) 우왕의 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와 1377년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 의하여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이성계의 출사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1396년 여강(驪江)으로 가다가 죽었다.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시켜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그의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