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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책판

백불암선생문집(百弗庵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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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백불암선생문집(百弗庵先生文集) 유물형태 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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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불암선생문집』은 조선후기의 문신·학자인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시문집이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초(太初) ·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이 책은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연도를 알 수 없다. 문집 중 시는 도학사상을 피력한 것이 대부분이다. 서(書)는 방대한 분량으로 학문적인 문답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주로 예학에 관한 것이며 간혹 성리학에 관한 것도 있다. 잡저의 「독서잡록(讀書雜錄)」은 독서하는 중에 선현들의 중요한 말을 그때그때 적어놓은 것으로 대개 심성(心性)에 관한 것이 많다. 이밖에「봉선입의(奉先立議)」·「효제당절목(孝悌堂節目)」·「학재절목(學齋節目)」·「부인동동약절목(夫仁洞洞約節目)」 등은 문중 또는 향리의 친목·교화 및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정한 절목으로 내용이 상세하여 연구할 만한 자료로 평가된다. 잡저에는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이 있는데, 경관이 잘 묘사되어 있다. 「평거강의」는 평소에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제자인 최흥벽(崔興璧)이 기록한 것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최흥원은 1778년(정조 2)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 교관(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주부를 거쳐 1784년 세자익위사좌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여 후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백성들의 살기 어려운 정상을 보고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우고 강학(講學)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며 선공고(先公庫) · 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안정을 얻게 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유명한 부인동규(夫仁洞規)였다. 죽은 뒤 1789년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고, 이듬해 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