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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회화

동명선조유묵(東溟先祖遺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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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동명선조유묵(東溟先祖遺墨) 유물형태 회화
기탁자 평해황씨 해월종택 크기 25.5×27.8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이 친필 유묵을 서첩으로 만든 것이다. 황중윤은 황여일(黃汝一)의 아들로, 본관이 평해(平海)이고 자가 도광(道光)이며 호가 동명(東溟)이다. 정구(鄭逑, 1543~1620)와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퇴계학을 충실히 익혔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광해군에게 정직한 간언을 하다 파직 당하였다. 1617년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이 유묵에는 「평울사폐소(平蔚四弊疏)」, 「회퇴신변소(晦退申卞疏)」, 「과양지행시(過陽智行詩)」 3편의 친필이 수록되어 있다. 「평울사폐소」는 평해와 울진 지역의 4가지 폐단을 임금에게 아뢰고 시정을 요청한 상소문이고, 「회퇴신변소」는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문묘종사에서 배척하려 한 것이 매우 부당한 처사임을 밝히고 두 대유(大儒)를 계속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문이다. 「과양지행시」는 황중윤이 학문을 향한 자기 열정을 표현한 시이다. 이 서첩의 상소문에는 임금의 답변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 점이 이채롭다. 낡은 유묵에 종이를 따로 배접하여 서첩으로 만든 것으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