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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청백리

공직 정신의 표상 청백리(淸白吏)

청백리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사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청백(淸白)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의 약칭으로, 유교문화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청백리는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되어 「청백리안(淸白吏案)」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을 가리킨다. 청백리는 작고한 사람들에 대한 호칭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은 염근리(廉勤吏) 혹은 염리(廉吏)라고 불렀으며 반대로 부정부패한 관료는 탐관오리(貪官汚吏) 혹은 장리(贓吏)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청백리나 탐관 오리로 선발되거나 지목된 사람은 본인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함으로써 엄격히 관리되었다.

청백리를 선발하고 표창하는 제도는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하는 전통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인종 14년(1136)에 청렴하고 절대 있는 사람들을 뽑아벼슬을 준 기록이 있다. 최석(崔奭), 윤해(尹諧), 최영(崔瑩) 등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들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안성(安星)등 5인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모두 217인을 청백리 혹인 염근리로 선발하였다.

안동지역은 보백당 김계행, 허백당 김양진, 동호 번영청, 유연당 김대현, 함벽당 유경시 등 많은 청백리들을 배출함으로써 현재에도 그 숭고한 행적이 공직자의 귀감이 되고있다.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1521)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50세가 넘어 과거에 급제하여 흥문관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연산군 때 대사간에 있으면서 척신들의 비리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하였다. 조선초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며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맑고 깨끗함 뿐이다."라는 유훈을 남겼다. 길안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허백당 김양진(虛白堂 金楊震 , 1467~153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기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이다. 1504년 홍문관부수찬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모비 능묘의 호를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여 예천에 유배되었다. 1520년(중종15)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서는 녹봉을 털어 빈민 구제에 힘썼으며, 황해감사로 부임해서는 각 고을의 폐단을 일소하고 선정을 펴 칭송을 받았다. 중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고, 예천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동호 변영청(東湖 邊永淸, 1516~1580)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개백(開伯), 호는 동호(東湖)이다. 사간원정언을 역임 하였으며 당시의 간신들의 비행을 격렬히 상소로 고한 후 낙향해 있다가, 1559년 구봉령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집의를 거쳐, 남원부사로 나가 크게 선정을 베풀어 명종으로부터 표리(表裏)와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금고서원에 제향되었다.

유연당 김대현(悠然堂 金大賢, 1553~1602)

영주 출생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희지(希之), 호는 유연당(悠然堂)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항병을 조직하고 안집사 김륵의 휘하에 들어가 항쟁하였다. 난중에 기민의 구제와 병자의 규휼에 진력하여 1595년 그 덕행으로 천거되어 성현도 찰방이 되었다. 1601년 산음현감 재직시 봉록을 털어 향교를 중건하고 교학에 힘썼다. 영주 구호서원과 안동 도림 추원사에 제향되었다.

함벽당 유경시(涵碧堂 柳敬時, 1666~1737)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흠약(欽若), 호는 함벽당(涵碧堂)이다. 1694년(숙종20)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ㆍ예조좌랑ㆍ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에 병서를 연구하여 관군의 장수들에게 진법을 가르쳤으며,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올랐다. 낙연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