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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경주 최부잣집

 
마우스드래그 하시면 전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쌀 창고인 최부잣집 천석 곳간이다. 최부잣집의 재산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최부잣집의 가훈

* 제가(齊家)를 위한 여섯 가지 가훈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바른 선비가 되기 위한 열 가지 가훈 : 가거십훈(家居十訓)
1. 인륜을 밝혀라(明人倫)
2.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하라(事親孝)
3. 임금을 사랑함에 충성을 다하라(愛君忠)
4. 가정을 잘 다스려라(宜室家)
5. 형제 사이에 우애를 지켜라(友兄弟)
6. 친구 사이에 신의를 지켜라(信朋友)
7. 여색을 멀리 하라(遠女色)
8. 술에 취함을 경계하라(戒?酒)
9. 농업과 잠업에 힘쓰라(課農桑)
10. 경학을 익히라(講經學)

* 수신을 위한 여섯 가지 가훈: 육연(六然)
1.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2.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3.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4.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5.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6.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군자의 정신

최부잣집의 가훈에는 ‘재산을 만석 이상 지니지 말라’는 조목이 있다. 이것은 일정 정도 이상의 재산은 반드시 모두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최부잣집에서는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으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당시에 대체로 수확량의 7-8할을 소작료로 받았는데, 최부잣집에서는 5할 이하로 받았다. 이 정도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가난한 소작인들은 최부잣집 덕분에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을 감사해했고, 최부잣집의 논밭이 더 늘어나기를 바랐다. 최부잣집의 논밭이 늘어날수록 가난한 소작인들이 혜택을 보기 때문이었다.

또 최부잣집에서는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라는 가훈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래서 최국선은 1671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집의 곳간을 헐고 큰 솥을 내걸었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또 최국선은 흉년이 들었을 때 담보 계약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라.”

이렇게 최부잣집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참된 군자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 덕분에 활빈당이 일어나 악덕 부자들을 공격했을 때, 최부잣집은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절제를 황금처럼 여기는 바른 선비의 몸가짐

최부잣집의 시조인 최진립은 후손들에게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을 남겼다. 조선 시대는 철저하게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진사의 지위가 되어야 신분과 부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요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권세욕은 허락되지 않았다. 지위가 높아지고 권세가 강해질수록 권력 다툼에 휘말릴 위험이 높고, 그런 만큼 선비의 바른 몸가짐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권력은 부를 요청하고 부는 권력을 원하는 이 시대에, 꼭 되새겨 보아야 할 맑은 선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최부잣집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만 입어야 했다. 재산을 관리하는 안주인이 만석의 재산을 믿고 사치를 부린다면, 그 재산은 얼마가지 못하고 바닥날 것이다. 그래서 최부잣집에서는 안주인의 근검 절약을 대단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남자들도 늘 술과 여색을 경계함으로써, 재산이 헛되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욕심 없는 부자였던 최부잣집, 그 안에는 절제를 황금처럼 여기는 선비의 정신이 있었다.

이득보다 올바름을 중시한 정보의 경영과 철학

재산을 효과적으로 불리는 방법은, 물건 값이 떨어졌을 때 많이 사들였다가 물건 값이 높아지면 비싼 값을 받고 되파는 것이다. 하지만 최부잣집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재산을 불리지 않았다. 이런 방법은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상극(相剋)의 경영 철학이기 때문이었다.

최부잣집에서는 흉년기에는 땅을 사들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했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흰 죽 한 끼에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란 말도 있었다. 그러니 부자들에게 흉년은 논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이것을 금했다.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 최부잣집에서는 파장 때 물건을 사지 못하게 했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인내하면서 ‘떨이’ 물건을 기다렸다. 최부잣집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가장 질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제일 먼저 가지고 왔다. 몇 푼의 이득을 멀리하고 바른 길을 지켜야 한다는 최부잣집의 경영 철학은, 서로 살려주는 상생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을 위한 전재산을 투척한 멸사봉공의 정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아무 사심 없이 대대로 내려오는 만석 재산을 쾌척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부잣집은 망설임 없이 전재산을 독립 운동과 교육 사업을 위해 헌납했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항일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한 독립투사 안희제와 의기투합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비밀리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방편으로 세운 회사였다. 그러나 백산상회는 상해로 계속 독립자금을 보내다보니 곧 부도가 나고 말았고, 그 빚은 모두 최준이 지게 되었다. 그 액수는 당시 돈으로 벼 3만석에 해당하는 거금 130만원이었다. 결국 최부잣집의 모든 재산은 압류되었고, 최준은 졸지에 만석꾼에서 빚쟁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최준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가산을 모두 투척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른 선비가 해야 할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재산의 반을 찾을 수 있었지만, 최준은 그것마저 교육 사업에 헌납했다. 그래서 현 영남대학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모든 재산을 기꺼이 헌납한 멸사봉공의 정신, 이것이 바로 최부잣집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