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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생활

교육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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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서당도) >

< 김홍도의 (서당도) >

조선왕조는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유교정치를 표방하고 유교의 이념에 따라 민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정치와 교육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조선에서의 교육은 매우 중시되었다. 조선의 교육은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뉜다. 관학은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지방의 향교(鄕校)를 일컫는다. 사학(私學)은 기초과정을 배우는 서당과 각 지방의 선비들이 중심이 된 학문 공동체로의 서원(書院)이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는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고, 학생들의 목표도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계속되는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향촌에 은거하면서 교육에 힘쓰는 선비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진정한 선비의 길을 탐구한 사림(士林)은 부귀나 출세가 아닌 자기 수양만이 진정한 학문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고, 교육의 목적은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16세기 사림들은 몇 차례에 걸친 사화를 거친 후 중종대에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의 이상정치인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에 힘을 기울였다. 사림들은 왕도정치의 실현은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실천과 함께 백성에 대한 도덕적 교화(敎化)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소학(小學)』보급운동과 향약(鄕約)을 통한 대민교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지방의 향교에서는 『소학』교육에 힘썼고, 『소학』에 실려 있는 향약을 향촌사회에 보급시키고자 하였다.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으로 향촌사회의 재지사족층은 대민지배력을 강화하였고, 향촌의 자치규약을 마련하여 이를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 지배체제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로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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