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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서보급
관련유물 농가집성 권농첩
강희맹 <금양잡록>

강희맹 <금양잡록>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전인구에서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 역시 농업이었다. 그러므로 농서의 편찬과 보급은 농업 기술의 발전, 민생의 안정, 그리고 국가재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종 대에는 역서(曆書) 간행, 『농사직설(農事直說)』의 반포 등이 농업기술의 향상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중국의 농서를 참고하고, 경험이 많은 노농(老農)의 농사체험을 바탕으로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지침서로 주곡작물의 경작법을 간결하게 논한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민간에서의 농서 저술도 활발하여 14세기말 금양(衿陽 : 현재의 경기도 시흥)에서의 경험과 견문을 토대로 저술한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이 대표적이다. 이는 곡식작물을 80품종으로 나누어 형태와 재배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사시찬요초』는 곡식·작물·채소·과수의 재배, 축산·양잠·양봉 그리고 계절에 따른 식품가공 등을 논술하였다. 이 세가지 농서에 『구황촬요(救荒撮要)』가 부가되어 합본된 것이 『농가집성(農家集成)』으로서 1656년(효종 7)에 간행되었는데, 이는 조선 전기의 농학을 종합 체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 따르면, 벼가 익는 시기에 따라 다양한 품종이 있어 각기 파종·이앙·수확의 시기와 방법이 잘 구별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실학(實學)의 학풍이 성숙하면서 실학자들의 농정론(農政論)이 농업기술론과 아울러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반계수록(磻溪隧錄)』·『농포문답(農圃問答)』 같은 제도론적 저술,『색경(穡經)』·『산림경제』와 같은 소백과서(小百科書)를 겸한 농서들이 나왔다. 그리고 계속되는 흉작으로 인하여 구황(救荒)서적이 간행되었으며, 1763년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온 뒤 이와 관련된 농서들이 편찬되었다. 또한 북학파의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抄)』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등에서는 농업정책·토지제도·농업기술이 비판적으로 논의되었으며, 특히 농업기술론에서는 서양농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던 중국농법의 소개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농학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로 집성되었다. 『임원경제지』는 『임원십육지』라고도 하는데, 16개 부문 중 7개 부문이 농업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음식·가옥·지리 등 실용적인 모든 사항을 포함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백과사전이자, 전근대 농학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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