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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일반
관련유물 구례홀기 여자훈가 일용지결
사례편람(四禮便覽), 1844년

사례편람(四禮便覽), 1844년

동양에서는 덕치(德治) 또는 예치(禮治)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공맹유학사상의 특징중의 하나가 덕치, 예치주의이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도 예치주의 사상은 그의 정치, 행정 사상의 기본을 이룰 정도이며, 일본학자들은 전근대 동양사회를 '예치시스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체제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만큼 동양사회에서는 예치가 중요한 사회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란 인간관계의 형식을 나타내는 총체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를 규정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가 시대에 따라 역사적을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예의 정신은 변할 수 없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 예학의 발전을 이룬 시기는 17세기였다. 이 시기에 성리학의 발달은 예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16세기의 성리학자들도 이미 예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에는 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예의 구체적 시행 문제에 대한 탐구로까지 이어지면서 다양한 예론으로 정립되었다는 점이 이 시기 예학의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사대부 중심의 예학을 발달시키면서 이념적으로는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예의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는 서인의 예론과, 『주자가례』와는 다른 체제의 예서를 편찬하면서 이념적으로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즉 군주의 경우에는 예의 적용이 달라야 함을 주장하는 남인의 예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론의 차이가 정치적 대립과 결부하여 예송(禮訟)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서(禮書)로서는 김장생이 1583년에 『상례비요(喪禮備要)』를, 1599년에 『가례집람(家禮輯覽)』을 펴내 우리 예절의 정립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조선후기에는 많은 예서(禮書)가 편찬되었으나, 1844년에 펴낸 도암 이재(李縡)가 펴낸 『사례편람(四禮便覽)』이 많이 읽혀졌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는 이기심성론에서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퇴계학파 가운데 주로 영남 남인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계승하여 이이의 이기겸발설을 비판하는 사상체계를 확립해갔다. 이현일(李玄逸 : 1627∼170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학문·사상 경향은 이발(理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주리파(主理派)로 불린다. 18세기 초반에는 주기파 내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 벌어졌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임성주(任聖周 : 1711∼88)에 의해 기일원론의 철학사상이 정립되기도 했다. 그후 19세기에는 철학적으로 주리론의 경향이 강화되면서 기정진(奇正鎭 : 1798~1879)이나 이진상(李震相 : 1818~86)이 이일원론적인 사상체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성리학은 변화하는 사회현실에 전진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학문·사상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그대신 실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문·사상 조류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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