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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
서울상업의 중심지<운종가>

서울상업의 중심지<운종가>

유학의 경제사상은 치인(治人)의 학문, 곧 경세론(經世論)에 해당한다. 그런데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하는 문치(文治) 위주의 사회였으므로, 경세의 근본으로서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의 도덕정치가 추구되었다. 유학의 경제사상은 기본적으로 인정(仁政)을 위한 기초적인 소비 욕구의 충족을 중시한 반면, 인의(仁義)를 손상할 우려가 큰 사리(私利) 추구나 경제적 동기의 억제를 추구한다.

이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서 조선전기에 본업인 농업에 힘쓰고 말업이라고 여겼던 상공업을 억제한다는 무본억말(務本抑末)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시장이 성장하면서 시장 기능의 활성화와 화폐 유통을 통하여 국가적인 재분배체제를 보완 개선하고자 했던 실학의 경제사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들은 경제적 동기를 긍정하였고, 이에 따라 농업과 더불어 상공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장려하고자 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의 서양근대 문명의 충격은 개화사상으로 나타났다. 개화파는 경제적 동기를 중시할 뿐만 아니라 경쟁을 사회원리로 인식하고 재산권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유교적 전통에 바탕을 둔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같이 조선시대의 경제사상은 사회의 발전에 따라 경제활동을 보다 긍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민생의 안정과 국가적 재분배 체제의 안정을 추구하였다고 하겠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조선시대는 각각의 신분에 맞게 경제적 역할도 달리한다는 직역론을 긍정한 사회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농업생산성의 발전과 개별적인 경제력의 차이에 의하여 점차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체계는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상공업의 발전과 화폐의 유통, 지방 장시의 활성화 등은 조선후기에 변모된 양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경제적 측면에서는 지주(地主)이기도 하였지만, 경제적 상태에 따라서는 직접 농지를 경영하거나 소작하는 자작농이나 소작농, 또는 자소작을 겸하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 지주는 이른바 양반지주라고 일컬을 정도로 양반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사회적인 분화가 가속화되면서 다양한 신분층에서 지주가 등장하였다. 양반 가운데에서 관직을 가진 경우는 경제력을 유지하기가 훨씬 유리하였다. 흔히 양반의 2대 재산은 노비와 토지라고 하는데, 특히 조선전기의 경우에 소유한 노비의 수가 경제력을 좌우하였다. 그리고 토지의 소유규모에 따라서는 지주, 자영농, 자소작농, 소작농 등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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