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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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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생활

향촌의례
관련유물 향약응행절목 이륜행실 부 효낭전
<심의(深衣)>

<심의(深衣)>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해 성리학과 함께 도입된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유교의례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강조되었다. 조선은 초기부터 유교적 의례의 수용에 힘썼고, 15세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집성하였다. 주자가례 등의 예서(禮書)는 16세기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궤를 같이하여 중시되었다.

한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소학(小學) 등 성리학의 기본경서와 함께 각종 예서의 언해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6세기 말 신식(申湜)의 『가례언해』는 최초의 본격적 언해서로, 주자가례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는 향촌의 지배층의 지방교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향촌사회에서 교화의 주체인 재지사족은 유향소를 설치하여 향풍을 바로 잡고, 『소학』의 향촌자치를 현실에서 시행코자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실시하였다. 향음주례(鄕飮酒禮)는 본래 중국 주대(周代) 향대부(鄕大夫)가 매년 고을의 인재를 뽑아 조정에 천거하고, 그들을 빈례(賓禮)로 대우하고 베푼 전송의례가 전래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지방 수령이 고을의 유생(儒生)을 청하여 읍양(揖讓)의 예절을 지키며 주연(酒宴)을 함께 하였는데, 이는 『오례의(五禮儀)』의 상정(詳定)과 더불어 일반화되었다. 향사례(鄕射禮)는 육예(六藝)의 하나인 활쏘기를 지방수령의 주재 하에 행한 것으로, 국가에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서 활을 쏘아 그 예의 도수[禮數]를 살피는 대사례(大射禮)에 대비되었다.

양란 이후 예(禮)는 사상적 뿐만 아니라 전란으로 인해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 방도로 그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이에 가례문답서(家禮問答書)의 저술이 활발해졌고, 김장생의 『의례문해(疑禮問解)』, 김집의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김응조의 『사례문답(四禮問答)』등이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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