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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농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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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氏古家(경주 최부자집)

崔氏古家(경주 최부자집)

조선시대의 부농층 가운데 명문가로 부상한 유력한 가문들도 있다. 부농층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토지를 소작경영으로 유지하였다. 이런 명문가 중에 경주 최부자집은 대표적인 명문가의 하나이다. 오늘날 최씨 집안이 실천해온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명문가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 경주 최부자집이 교동으로 이주해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그후 조선시대 최고부자였던 최부자집은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이었으며,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했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해방 직후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를 설립할 때 이 집도 기부했다. 최부자집은 오늘날 경주 교동법주의 본산이기도 하다. 가문의 명예와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안 '훌륭한 가훈' 때문이라고 한다. 그 '가훈육훈'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둘째,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말것.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넷째,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 것.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는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여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이다. 또한 처세 6연은, ‘처신은 초연하게, 사람을 대할 때는 화기애애하게, 일이 없을 때는 맑은 물처럼,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뜻을 얻으면 담담하게, 뜻을 잃어도 태연하게’ 등이다. 가훈 가운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철학은 당시의 소작료가 대체적으로 수확량의 7할 정도를 받는 것이 보통 관례였는데, 최부자집은 예를 들면 4할을 받거나 아니면 그 이하로도 받았다. 또한 전통사회에서는 양반집이나 부자집에 며칠씩 또는 몇 달씩 그 집 사랑채에 머물다 가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 최부자집 사랑채의 과객 수용 능력은 100명 가량이었다. 1년에 약 1000가마의 쌀을 과객 접대하는데 사용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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