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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관리생활

외교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事大交麟)을 정책적 바탕으로 삼았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강국인 중국과 돈독한 우대관계를 유지하고, 일본 등과는 함으로 나라의 안정을 보장받아 대외적인 안정과 국내의 정치를 안정시킴은 물론, 통치력을 강화시키고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꾀하려 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에 파견된 사신단(使臣團)은 사신의 총책임자인 정사(正使), 정사를 보조하는 부사(副使)와 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書壯官)을 비롯하여 40여 명으로 구성을 하였다. 이때 정사는 3정승 중 1명이나 6조의 판서(정2품의 벼슬)가 담당하였다. 사행(使行)에는 공물(貢物)로 조선의 특산물이 마련되었는데, 주로 인삼, 호피(虎皮), 수달피, 화문석, 한지, 모시, 명주 등이었다. 조선왕조의 대외무역은 사신왕래를 통한 공무역의 길이 유일했으나, 실재 사신파견의 과정에서 사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사신은 정기적으로 보내는 정기사행(定期使行)과 임시로 구성하여 파견하는 임시사행(臨時使行)으로 구분된다. 정기사행으로는 정조사(正朝使 : 매년 정월), 성절사(聖節使 : 황제 · 황후의 생일), 천추사(天秋使 : 황태자 생일), 동지사(冬至使 : 동지) 등이 있었다. 임시사행은 조선내부의 각종 정치적 문제나 중국의 정치적 변동에 따라 사신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통신사는 조선과 일본간의 공식 외교사절로,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면서 파견되었다.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고, 이후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報聘使) · 회례사(回禮使) · 회례관(回禮官) · 통신관(通信官) ·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이전의 경우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주임무였다.

『해행총재(海行總載)』에는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일 양국 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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