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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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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례

직접노동층
김홍도 <풍속화>

김홍도 <풍속화>

토지를 소유한 지주 이외에 직접 노동을 하는 계층은 주로 노비와 작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외에 가족 노동력을 중심으로 생활을 유지하였는데, 이를 자작농업형이라고 한다. 자작농업은 조선초기에는 과전법의 실시로 인하여 많이 늘었지만, 16세기 이후부터는 급속하게 몰락양인이나, 압량위천(壓良爲賤)으로 인하여 노비신분이 급증하였고, 동시에 작인(作人)으로 활동하였다. 더구나 조선후기에 가서는 임노동의 확대에 따라 품팔이를 한다거나, 세가(勢家)에 투탁하여 정식 세원(稅源)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많아 임노동층이 더욱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의 자족(自足)은 자연을 벗삼아 자연친화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사회는 육체노동이나 상업활동에 양반층도 참여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은 「전가팔곡(田家八曲)」을 통해 사대부의 원(願) 의식을 실천함으로써 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자기 분수에 맞는 치인(治人)의 길을 읊었다. 여기에서 형상화된 농부의 생활은 노동의 즐거움을 깨닫고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적인 생활이다. 정약용(丁若鏞)이 강진 유배시절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근교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거나, 환금(換金) 작물의 재배를 권유한 것은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 그리고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1816년(순조 16)에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는 농가에서 매달 할 일과 풍속 등을 한글로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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