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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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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례

향교 봉사
<석전제>

<석전제>

향교는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으로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향교도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동무·서무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군현 규모에 따라 일정인원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 등을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재정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조선후기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書院)의 발흥으로 부진하여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하는 기능만 남았다.

조선 후기 향교의 사회 교화적 기능으로는 석전제(釋奠祭) 및 삭망(朔望) 분향, 사전(祀典) 등의 봉행을 들 수있다. 유가적 이념을 국시로 표방한 조선조에서는 유가적 규범을 향촌 사회에서 온존, 보급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춘추 석전제와 삭망분향의 봉행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사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 일찍부터 향교의 고유한 행사로 정착되었다.

비록 조선 후기의 향교가 피폐했다고는 하지만 그 고유의 기능인 춘추의 석전과 삭망분향의 향사(享祀)를 통한 교화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석전은 유가적 규범의 온존 및 보급의 차원에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고려조 이래로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해졌으며, 현재까지도 향교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남아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 안자 등의 사성(四聖)을 배향하였고, 10철(哲) 등 제현(諸賢)을 종향(從享)하였으며, 동·서무에는 역대 유현(儒賢) 등 110위(位)를 종사(從祀)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의 18현(賢) 중 정몽주 이하 15현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동서무에 종향(從享)되었다. 그러나 봉안의 규모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대설위(大說位), 중(中)설위, 소(小)설위로 나누어 봉안하는 신위의 수를 차감하였는데, 대설위는 5성(聖) 10철(哲) 70자(子)를 봉안하였다.

향교는 또한 사직제(社稷祭), 성황제(城隍祭), 여제 등을 봉행하였다. 사직제는 춘추의 석전제 다음 날에 봉행되었으며, 성황제와 여제를 봉행하였다. 향교에서 이러한 제 행사를 주관하거나 보조한다는 것은 향교가 지역사회에서 가지는 역할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또한 향교에서는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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