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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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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선생일고(花山先生逸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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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정보 테이블
유물명 화산선생일고(花山先生逸稿) 유물형태 고도서
기탁자 크기 29.7X20.1

이 책은 안동권씨 정남문고에서 소장하던 『화산선생일고(花山先生逸稿)』이다. 권주(權柱, 1457~1505)의 시문들을 총1책으로 엮어 1798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두인(權斗寅)의 서문이 있다. 시(詩) 8수, 서(序) 1편, 편지글 2편, 잡저(雜著)로 「시책(諡冊)」 1편, 유묵(遺墨)이 실려 있고, 부록으로 권주에 대한 신도비명, 묘갈명, 교서, 유사 등이 실려 있다.
권주는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이다. 1474년 진사시에 합격, 148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94년 12월 홍문관직제학 표연말(表沿沫), 전한(典翰) 양희지(楊熙止)와 함께 「대행왕행장(大行王行狀:성종행장)」을 찬진하고, 1495년 3월 다시 「대행왕시책(大行王諡冊)」을 제진(製進), 같은 해 8월에 집의, 1498년 7월 통훈대부에 오르면서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 경연시강관을 역임하였다.
1504년 윤4월 정축일에 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으며, 그달 경진일에 사사시켜야 한다는 전지가 있었으나, 유순(柳洵)·김수동(金壽童) 등의 “권주는 그 당시에 주서로 단지 승지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다.”는 계(啓)에 따라 사형을 면하고 장형(杖刑)을 받은 뒤 평해(平海)로 귀양갔다. 그러나 1505년 6월 폐비 윤씨의 사사 때에 사약을 받들고 간 것으로 거듭 논죄되면서 사사되었고, 형제자매도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중종 1) 10월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신원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환장(還葬)이 허용되었다. 젊은 나이로 등제하였으나 문학에 뛰어나 명성이 있었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대명외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