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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청과 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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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교안(校案) 유물형태 고문서
기탁자 크기 37.0×24.0㎝

예안향교(禮安鄕校)의 소장자료 중 46책 중 제30책에 해당하는 교안(校案)으로 10장으로 되어있다. 이 교안은 액내(額內)교생을 순서대로 적은 것으로, 교안은 보통 향교교생안(鄕校校生案)을 말한다. 교생은 출신성분에 따라 상액(上額) · 중액(中額) · 하액(下額)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상액은 액내로 청금록(靑衿錄) · 부거안(赴擧案)에 수록되고, 중 · 하액은 교생안(校生案)에 수록된 사람들이었으나 뒤에는 액내생이 교생으로 채워졌다.
청금록에 등재되는 동재유생(東齋儒生)은 내외 현족자(顯族者) 중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을 갖춘 자를 천거하게 되어있었다. 따라서 청금록은 향안(鄕案)과 함께 양반자격을 보증받는 중요한 문적이 되었다. 다만 향안은 내외 현족의 여부만을 따지는데 반하여 청금록은 현족 중에서도 유교지식의 유무를 필수조건으로 하고 장차 과거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으므로 청금록이 향안보다 더욱 중요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향교에 대한 관심이 줄고 향교의 시설이나 교관들의 수준이 떨어짐에 따라 양반 자제들은 향교에 들어가기를 꺼려했고, 양인 교생들과 함께 공부하기를 싫어하였다. 양반은 직접 향교의 교육을 받는 교생이 되는 것을 기피하였고, 양인은 교생이 되는 것을 갈망하였다. 따라서 교생은 점차 양인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향교 교육은 갈수록 부실하게 되어갔다. 향교는 지방의 유학교육기관이라기보다 군역을 피하거나 기술관·서리 등 중인이 되기를 원하는 양인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군역의 면제와 관련해 군현의 교생수가 크게 증가하였다.